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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덩샤오핑(鄧小平)이 열어놓은 문과 닫은 창 (FT중문망 2014.11.10)
2014-11-21
덩샤오핑(鄧小平)이 열어놓은 문과 닫은 창(2014 11 10).pdf
【편집자의 말】 올해는 덩샤오핑의 탄생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 중국이 거둔 많은 성과들과 여러가지 문제점들 모두 지난 20세기 80년대 이후 펼쳐졌던 덩샤오핑의 집권 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톈저(天則)경제연구소/CRNTT(中評網) 및 <염황춘추(炎黃春秋)>는 지난 9월 말 <덩샤오핑과 오늘의 중국>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문장은 중국 현대사학자 우웨이(吳偉) 선생님이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세미나의 기타 발표내용도 FT중문망 특집코너를 통해 계속해서 게재할 예정이다.
덩샤오핑과 아직 완성되지 못한 중국의 사회체제 전환
중국 당대 역사에서 덩샤오핑의 역사적 지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사회 발전 및 구조전환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다수의 자유파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중국 사회체제 전환의 목표는 시장경제, 민주정치 및 법치사회 이 세개의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삼위일체 목표의 수립은 중국 사회체제 전환의 완성을 의미하는 기본적인 표지라 할 수 있다. 위의 판단이 성립된다는 가정하에 지난 40년동안 이뤄진 시장경제, 민주정치 및 법치사회의 발전 및 심화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국 사회체제 전환과정에서의 덩샤오핑의 역사적 지위를 알아보고자 한다.
고도로 집중•통일된 계획경제 체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은 중국 개혁개방 이후 수십년간 정부와 민간사이에 형성된 공통인식이다. 이 공통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농촌의 농가 세대별 생산 책임제의 발전, 농촌 기업소 및 도시 개인사업체의 대두, 연해지역의 점차적인 개방, 각 요소시장의 형성 등을 포함한 80년대에 취득한 일련의 개혁개방 성과는 대부분 민간에서 시작되어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고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단, 그 당시 집권당의 주요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의 지지와 추진이 중요한 역사적 작용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가 아닌 "총허가사(總許可師)"로 덩샤오핑을 평가하고 있는데 이또한 잘못된 평가라고 할 수 없다.
1977년 복직된 이후 특히 1978년 중국공산당 주요 지도자로 자리잡은 이후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개방을 확고하게 추진하고 개혁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조직형식과 경영방식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1980년-1987년 기간 국무원 총리직을 맡은 짜오즈양(趙紫陽)은 재임기간 중앙정부와 덩샤오핑에게 대량의 경제개혁 건의와 주장을 제기했다. 필자가 알기로 덩샤오핑은 짜오즈양(趙紫陽)의 모든 건의사항에 지지를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항상 "서둘러라. 담대하게 시도하라. 틀려도 괜찮다. 바로 잡으면 되니까."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1983년, 1984년의 "계획경제를 중심으로 하고 시장조절을 보조수단으로 활용"할것이냐 "사회주의 상품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냐를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덩샤오핑과 후야오방(胡耀邦) 모두 짜오즈양(趙紫陽)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결국 "사회주의 상품경제 건설"을 경제개혁 목표로 한 <경제체제 개혁 결정>이 중국공산당 제12기 3중전회에서 통과되었다. 덩샤오핑은 <경제체제 개혁 결정>을 높이 평가하면서 "정치경제학 논문 초고를 완성한 기분이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경제체제 개혁 결정>은 실제로 중국의 경제개혁 목표의 패턴을 정립하였는 바 그 당시에는 사회주의상품경제로 불리웠다.
이 "상품경제" 모델과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제기된 사회주의시장경제와는 어떤 관계인가? 1988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회의에서 그 당시 국무원 연구센터 주임직을 맡고 있던 마훙(馬洪)은 짜오즈양(趙紫陽)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즉 사회주의상품경제를 발전시킨다고 하는데 상품경제와 시장경제는 어떤 관계인가? 짜오즈양(趙紫陽)은 이렇게 대답했다. 양자는 동일한 것이다. 다만 일부 사람들이 시장경제란 표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해 당분간 상품경제란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덩샤오핑은 복직하여 중앙 고위층의 정치 주도권을 점차적으로 확보한 후 중국 계획경제체제를 시장경제로 바꾸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경제개혁도 일시 중단되었다. 덩샤오핑은 "92년" 남부지역 순찰 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죽는 길 밖에 없다."고 대성질호 하면서 중국을 다시 시장경제개혁의 길로 이끌었다.
중국 경제개혁 및 경제체제 전환의 역사를 살펴볼 때 덩샤오핑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덩샤오핑도 신이 아닌만큼 그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십여년이 지난 후에도 중국이 여전히 경제체제 전환의 길에서 배회하고 있고 심지어 종전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8기 3중전회에서까지 지속적이고 심도 있는 시장화 개혁의 추진이 제기될 것이라곤 예견치 못했을 것이다.
경제체제 전환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덩샤오핑이 그가 한때 주장했던 정치개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체제 개혁을 떠나서는 경제체제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고 주장을 펼쳤던 바가 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 주장을 포기하게 되고 "89" 천안문 사태 이후에는 정치개혁은 까많게 잊어버린듯 경제개혁만 추진했다.
중국 정치체제 전환의 목표는 민주정치여야 한다. 20세기 70년대 말, 80년대 초복직 초기 덩샤오핑은 민주 문제를 반복하여 강조했다. 이론 학습 토론회 시기에 처해 있던 1979년 1월 27일, 후야오방(胡耀邦)은 회의 참가자들에게 덩샤오핑이 토론회 상황을 보고 받으면서 나눈 대화내용을 전달한 적이 있다. 이 대화는 덩샤오핑이 "사인방" 몰락 이후 최초로 제도 차원에서 민주를 논한 대화라 할 수 있다. 이 대화내용을 통해 자본주의 민주의 기원, 발전과 역사적 지위, 파리코뮌의 선거 와 "주인을 국민의 공복으로 만드는" 제도, "10월혁명 이후의 60여년간 민주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여" 소련이 겪었던 교훈, "우리는 국민들이 자신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점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도모해야 한다" 등 문제에 대해 덩샤오핑이 이론 학습 토론회 시기에 이미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5월 24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공작부 부장직 경력이 있는 중국공산당 원로 리웨이한(李偉漢)은 덩샤오핑과 긴 대화를 가졌다. 리웨이한(李偉漢)은 봉건사회 잔여사상 숙청이 공산당 내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덩샤오핑에게 의견을 드렸고 덩샤오핑은 리웨이한(李偉漢)의 의견에 동감을 표하면서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해당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추진하겠다고 답했다. 5월 31일, 덩샤오핑은 후챠오무(胡喬木), 덩리췬(鄧力群)과 나눈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단계 일부 당내 인사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러한 현상은 봉건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도간부 종신제, 지도자 종시제 폐지 문제는 우리 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 꼭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다. 수개월이 지난 후 덩샤오핑은 <당과 국가의 지도제도 개혁>을 주제로 한 연설에서 봉건주의 잔여사상 숙청이 당 내부에 미치는 영향, "권력의 과도한 집중" 반대, 당내 민주와 사회 민주의 발전 등을 논했다.
1986년 덩샤오핑이 정치체제 개혁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였지만 그 논조가 달라졌다. 덩샤오핑이 주장한 "정치체제 개혁"의 목표는 더이상 "권리의 과도한 집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활력, 효율성, 적극성"이었다.
1986년 10월에 정치체제 개혁 세미나가 시작되었고 덩샤오핑은 짜오즈양(趙紫陽)을 세미나 주관자로 지정했다. 짜오즈양(趙紫陽)이 기안한 정치체제 개혁방안에서는 민주정치의 건설(물론 이 앞에는 "사회주의" 네 글자를 붙임.)을 정치개혁의 장기 목표로 정했다. 덩샤오핑 본인은 "민주정치"란 개념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민주정치"란 정치개혁 목표는 덩샤오핑이 그때 당시 제출한 "활력, 효율성, 적극성"이란 정치개혁 목표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짜오즈양(趙紫陽)은 덩샤오핑이 제출한 "활력, 효율성, 적극성"을 개혁의 단기목표로 정하고 "민주정치"를 개혁의 장기목표로 정하는 처리방식을 택했다. 덩샤오핑도 이러한 표현방식을 받아들였고 <정치체제 개혁의 종합 비젼>에 대해 "완전히 동의"한다는 승인지시를 내렸다. 그는 중국공산 제13차 대표대회 보고서를 열람한 후 짜오즈양(趙紫陽)에게 "보고서는 읽었다. 아주 잘 작성했다."고 직접 찬사를 전했다. 이는 덩샤오핑도 정치개혁 장기목표에 대한 "사회주의 민주정치"란 표현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1989년 6월 이후부터 덩샤오핑은 정치개혁과 민주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경제개혁만 논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92년 남부지역 순찰 시를 포함하여 덩샤오핑은 정치개혁에 대해 단 한글자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덩샤오핑 서거 이후 몇세대의 지도부는 "절름발이 개혁"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실속 없이 한마디의 슬로건에 불과한 "민주정치"는 촌진척퇴하여 국민 권리에 대한 보장이 여전히 부족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비해 당국체제는 오히려 보다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위의 회고를 통해 알 수 있다싶이 민주 발전 문제를 대하는 덩샤핑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덩샤핑은 비록 중국 민주정치 전환을 추진하는 위인이 될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경력, 신분, 지위와 관념은 그로 하여금 이 과제를 완성할 수 없도록 했고 그가 남긴 정치 유산들은 심지어 중국의 정치체제 전환에 있어 "마이너스 자산"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중국의 또 다른 하나의 사회체제 개혁 과제는 바로 인치(人治)사회에서 법치사회로 전환하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마오저둥(毛澤東)이 법도 무시하고 하늘도 꺼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법제의 개념과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80년대에 반복하여 법제를 거론했고 1986년 정치체제 개혁 추진 시에도 법제의 개선을 논했다. 물론 이 "법제"의 "제"는 제도를 뜻한다. 이는 덩샤오핑을 탓할 일이 아니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법제(法制)"와 "법치(法治)"의 개념과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규명해야 할 점은 덩샤오핑이 주장하는 법제는 규제, 방범(防犯)의 의미에서 거론된 것이고 공민의 기본권리 보장과 연관된 언론법, 출판법, 결사법, 시위법 등의 입법에 있어서는 더우기 그러하다.
1980년 후야오방(胡耀邦)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서기처가 결사법, 출판법 입법을 제안하였으나 천윈(陳雲), 후챠오무(胡喬木) 등에 의해 부결되었다. 덩리췬(鄧力群)의 그의 회상록인 <12개 춘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1980년 9월 이후 자발적 조직에 관한 문제에 부딛쳤다. ……후챠오무(胡喬木)는 덩샤오핑, 천윈(陳雲) 동지의 지시사항에 근거하여 사회안정 유지 및 경제조정 보장 잠행조례를 작성하였고 잠행조례에는 불법조직과 불법간행물 단속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서기처는 이 부분을 부결하는 대신 ''결사법'', ''출판법'' 입법을 제안했다. 후챠오무(胡喬木)는 서기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1981년 1월 24일 덩샤오핑, 천윈(陳雲), 후야오방(胡耀邦), 펑전(彭眞)에게 서신을 보내 만일 ''결사법'', ''출판법'' 입법의 방식으로 불법조직, 불법간행물을 단속하고 등기를 요구하는 경우 중국공산당을 반대하는 자들이 틈을 탄다 해도 우리가 모를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덩샤오핑, 천윈(陳雲) 등은 후챠오무(胡喬木)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법에 따라 공민의 출판, 결사 요구를 해결하자는 후야오방(胡耀邦)과 서기처의 의견을 부결했다. 1981년 2월 20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은 <불법간행물, 불법조직 및 관련문제 처리에 대한 지시>를 발표하였고 이 지시문에는 "불법조직의 여하한 방식의 활동을 금지하고 여하한 방식의 출판과 발행을 금지하며 적법화, 공개화를 추진한다"는 규정을 담았다.
그 이후 덩샤오핑은 공민의 기본권리 보장에 관한 입법 문제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서 찬성을 표하고 입법을 서두를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1989년 3월 3일 오전, 덩샤오핑과 짜오즈양(趙紫陽)은 대화를 가졌다. 오즈양(趙紫陽)은 일각에서 중국에 언론죄가 있다는 관점이 제기되고 있음에 따라 결사와 출판 등의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을 규명할 필요성에 대해 덩샤오핑의 의견을 구했다. 덩샤오핑은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국면 통제 방법에 신경써야 한다. 특히 집회, 결사, 시위, 언론, 출판 등 법률, 법규의 입법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시도때도 없는 시위이다. 360일 매일 시위만 하면 다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자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 우리가 엄격히 통제하는 것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것이고 안정은 개혁개방의 기본 조건이라는 점을 다른 나라에 알려야 한다."
덩샤오핑의 지시내용을 통해 덩샤오핑이 그 당시 공민 기본권리에 관한 입법에 동의했지만 그 출발점은 보장이 아닌 제한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80년대 초기부터 후야오방(胡耀邦), 짜오즈양(趙紫陽)을 비롯한 수많은 인민대표대회 상뮈위원과 대표들이 헌법에서 언급한 공민의 제반 민주권리를 법의 형식으로 고정화 시키고 언론법, 출판법, 결사법 등의 입법을 제안하였지만 결국 1989년까지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시위행진법이 출범되기는 했지만 시위행진을 허가했다는 정보는 없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좌파세력의 교란과 후챠오무(胡喬木), 덩리췬(鄧力群) 등의 방해 등 원인이긴 하지만 보다 핵심적인 이유는 덩샤오핑, 천윈(陳雲)을 포함한 집권당 지도자들이 본인이 법률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체제 전환의 세개 목표 차원에서 덩샤오핑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덩샤오핑을 평가하고자 한다.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보기드문 진보적 지도자로 그는 중국 경제체제 전환에 역사적인 기여를 했다. 단, 중국의 정치 및 사회 체제의 전환에 있어서는 막대한 "마이너스 자산"을 남겨주었고 이는 뛰어넘기 어려운 역사적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덩샤오핑 정치사상의 점차적인 후퇴
1977년 복직 후부터 1997년 서거하기 전까지 덩샤오핑의 정치사상이 점차적으로 후퇴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필자는 본다.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 후 원로들이 연달아 복직되었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이 국가와 개인에게 입힌 재난을 깊이 기억하는 한편 과거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들 중의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을 야기한 사상적 근원, 제도적 근원에 대해 아주 정확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덩샤오핑 또한 그러하다. 1979년 1월 27일 이론 학습 토론회 기간 후야오방(胡耀邦)이 전달한 파리코뮌에 관한 덩샤오핑의 대화내용, 1980년 5월 24일 덩샤오핑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공작부 전임부장 리웨이한(李偉漢)이 가진 "봉건주의 척결"에 관한 대화, 1980년 5월 31일 덩샤오핑과 후챠오무(胡喬木), 덩리췬(鄧力群)간의 "일부 당내인사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이유"에 관한 대화, 8월 18일의 <당과 국가의 지도제도 개혁>을 주제로 한 연설문 등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덩샤오핑이 최소한 80년대 초기만큼은 민주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사고와 연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과 국가의 지도제도 개혁>은 덩샤오핑 정치사상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연설문에서 덩샤오핑은 기존체제의 다섯개 폐단, 관료주의 현상, 권력의 과도 집중 현상, 가장제 현상, 지도간부직 종신제 현상 및 다양한 특권 현상들을 지적했다. 일정한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문제의 표면에 불과하지만 덩샤오핑의 이러한 논술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즉 문화대혁명의 아픔을 겪고 당과 국가 고위 정치생활을 수십년간 경험한 이후 덩샤오핑이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미래를 경계하고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교훈에 대한 연구와 봉건주의 잔여사상이 당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체제상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었다는 자체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덩샤오핑이 민주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본다. 하나는 그 당시 후야오방(胡耀邦)의 이론 학습 토론회 보고내용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주의 벽" 사건의 영향(민주의 벽 운동 초기 덩샤오핑은 운동을 지지했다.)과 문화대혁명 발생 원인에 대한 본인의 심도 있는 사고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그의 권력, 지위의 안정화에 따라 민주를 논하고 봉건주의 반대를 논함에 있어 덩샤오핑의 정치사상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1979년 3월 이론 학습 토론회가 끝날 무렵 덩샤오핑은 유명한 <네가지 기본원칙 고수>를 주제로 한 연설을 발표했다. 이 연설은 덩샤오핑 사상의 "두개의 기본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표지이다. 1980년 8.18 연설 이후 후챠오무(胡喬木), 덩리췬(鄧力群)을 대표로 한 당내 보수파 세력은 폴란드 사건을 계기로 민주의 위험성을 과대 포장하여 덩샤오핑을 설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덩샤오핑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과 국가의 지도제도 개혁>은 더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봉건주의 척결사업 또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 이후 수년간 덩샤오핑은 정치체제 개혁 문제를 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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