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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자료] AP 기자, “북한의 지붕” 개마고원 견문록 (참고소식 2014.10.23) 2014-10-29

  • 원제 : 북한 도로 위에서의 일주일 - AP 북한특파원 크리스 탈매치
    "북한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개마고원은 울창한 숲이 가득하여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고지로서, 높은 산맥 한중간에 위치해 있다. 험준한 지형 때문에 한국전쟁 때에 연합군도 점령하지 못했던 지역이다. 이곳에는 현재 트럭 주차장이 건설되어 있다.
    이번에 우리는 매우 이례적으로 외국 기자가 취재한 적이 없었음은 물론 외국인들의 관광허가도 거의 내주지 않았던 이곳 여행을 허가 받고, 북한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북한의 전체 도로 2만 5천 킬로미터 중 약 2150킬로미터를 자동차로 이동하였다. 일주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평양에 돌아왔을 때, 우리가 이용했던 중국산 스포츠유틸리티(SUV) 차량 곳곳에 흠집이 생겼고, 타이어휠도 하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북한의 엄격한 통제에 따라 진행되었기 때문에, 중간에 멈춰 "북한의 지붕" 개마고원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직 인터넷 시대가 오지 않은 지역

    우리는 평양의 한 호텔에서 여정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에비앙 광천수에서 스키피 땅콩버터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품을 판매하는 수퍼마켓에 들러 물품들을 잔뜩 보급했다. 우리는 100달러어치의 오일 쿠폰을 구입했는데, 이 쿠폰은 디젤유 65킬로그램을 구매할 수 있는 티켓이다. 북한에서는 연료를 이렇게 구매해야 한다.
    북한의 수도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초토화 정책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는데, 나중에 소련의 도움으로 재건되기 시작했다. 개발도상국 기준으로 보면, 옅은 색상 계열의 고층건물, 높이 솟은 기념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도로를 가진 평양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대도시이다. 하지만 2500만 북한 사람들 중 평양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한 90%에게 있어서 이곳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의 보물성”처럼 생소할 따름이다.
    우리가 평양시내 통일대로를 달릴 때에는 Instagram을 통해 정보를 검색하고 Whatsapp을 통해 외국 친구들과 교신할 수 있었고,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유행하는 옷을 입고 손에 "아리랑"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평양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이 핸드폰은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하고 국제전화도 걸거나 받을 수 없다. 북한 사람들은 수도에서조차 아직 인터넷 시대에 진입하지 못한 상태이다.

    평양을 떠난 후 약 20여분이 지나자 우리도 더 이상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해졌다.

    사방에 가득한 표어와 구호

    평양을 떠나는 길에 우리는 공공버스, 궤도전차, 당정 간부들의 검은 승용차, 컬러풀한 새 모델 택시들을 지나쳤다. 최근 수년 동안 택시가 많이 늘어나서 북한에서도 이제 더 이상 신기한 존재는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여러 마을들을 지나치면서, 원산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이동해 북한 제2의 도시인 함흥 쪽으로 달려갔다.
    이동하면서 우리는 전통적 의미의 북한을 볼 수 있었다. 크지 않은 규모의 단층 주택들 낡았지만 매우 질서정연하게 위치해 있으며, 기와지붕 아래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경계를 짓고 있다. 어떤 집에는 간단한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집에 TV가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집들은 지붕에 커다란 태양에너지 집적판도 설치돼 있었다.
    대부분의 북한 마을은 역시 도시였고, 도시 중앙 광장에 북한의 국부 김일성과 그 아들 김정일의 거대한 모자이크 초상화를 중심으로 건설되어 있었다. 모든 가정에 그들의 초상이 걸려 있었고, 모든 성인들의 가슴에 그들의 휘장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말들은 들을 수 없었고, 그저 정부가 그들에게 전하는 말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위대한 항공 산업국이다", "우리나라는 최고이다", "우리 자신의 길을 가자" 등 구호가 눈에 띄었고, 특히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일치단결"이라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구호들은 빨간 글씨로 포스터, 벽화, 플랜카드 등에 쓰여 걸려 있거나 돌 위에 조각되어 있었다. 밭 중간 중간에는 주먹을 쥔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요성과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선포하는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경축, 1조 정영일 조장 잡초제거 작업 1위”라고 쓰여진 플랜카드도 눈에 띄었다.

    농업은 여전히 막중하고 시급한 업무

    북한의 토지 중 약 5분의 4는 울퉁불퉁한 황무지로서 경작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나치는 계곡마다 또 평지마다 작물이 재배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북한에서 농업 자급자족은 여전히 시급한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곳곳에서 벼, 옥수수, 콩, 배추가 재배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언덕에서는 사과, 배 등 과실류가 재배되고 있었으며, 산악 지역에서는 감자가 재배되고 있다. 또한 마을마다 버섯이 재배되고 있었다. 이는 1990년대 북한이 기아 재난을 겪으면서 대응책으로 개발한 방법이다.
    절망적이던 기아의 나날은 이미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올해 UN 전문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은 수 십 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의 자급률을 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영양 부족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세계식량계획기구(WFP)는 북한 어린이의 3분의 1이 발육 부진 상태라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기아 문제에 대응해 내놓은 정책은 다른 분야의 파괴를 가져왔다.식량 재배를 위해 산 속 나무들을 베어내면서 산사태와 침식 위험이 높아진 것이다. 북한의 산비탈은 풀과 관목으로 채워져 있었고, 또한 어디서나 양들이 눈에 띄었다. 1996년 김정일이 대규모 양 기르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지금은 어느 곳이든 산양이 존재하고 있다.
    땅 위 곳곳에는 절망적이었던 1990년대의 흔적뿐만 아니라 번영했던 1960년대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당시 북한의 공업화 수준은 아시아 최상위권으로서 광산으로 유명했던 길주와 인근의 김책 등 동해안 도시들이 한때 번성했었다. 하지만 이들 지역의 땅들은 이제 모래와 자갈로 덮여 쓸쓸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북한은 현재 수십여 곳의 외국인투자특별구와 특별관광구를 설정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번 여행의 핵심은 웅장한 백두산을 관람하는 것이었는데, 수정같이 맑은 푸른빛 화산 호수를 지닌 이 산은 북한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지역 중 하나이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우리가 이번 여행을 허가 받게 되었을 것이다.
    자연적인 아름다움 외에도, 백두산은 혁명의 발원지로도 알려지고 있다. 그 곳에서는 옛 비밀기지가 복원되고 있었는데, 가이드는 당시 의복을 입고 김일성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던 전설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